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난 에브렌 (문단 편집) == 1980년의 쿠데타와 집권 == [[튀르키예군]]의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오른 에브렌은 [[1970년대]] 후반 튀르키예에 만연한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정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튀르키예는 뷜렌트 에제비트가 이끄는 중도 좌파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CHP)[*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정당이며 [[1950년]]까지 여당이였다.]과 쉴레이만 데미렐 총리가 이끄는 정의당(AP, Adalet Partisi)을 주도로 한 우파 연합 국민전선, 네즈메틴 에르바칸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성향의 이슬람계 정당 국민구제당(Millî Selamet Partisi,MSP)의 세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수많은 정치적 암살과 테러, 범죄가 횡행했고 [[1970년대]] 후반 5년 동안에만 총리직이 3번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에브렌은 [[1979년]] 말 직속 부하에게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케 함으로써 최초의 행동을 보인다. [[1980년]] 초 두 번째 보고서가 작성되고, 점점 상황은 극을 향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데미렐 총리는 [[1979년]] 이미 군부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 튀르키예 국가정보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상태였지만 강대한 [[튀르키예 육군]]의 지휘권을 쥐고 있는 에브렌에게 내각이 대응할 수단은 현실적으로 전무했다. [[1980년]] [[9월 12일]] 오전 에브렌과 군부는 행동을 개시한다. 군권을 장악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의 정부 기관들을 압박하는 그 앞에 총리와 관료들은 무력했다. 데미렐 내각을 몰아낸 그는 국가안보평의회(NSC)를 세우고, 의장으로써 2년간 국가원수 대행으로 권력을 잡는다.[*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것으로, 가장 강력한 숙청과 인권 탄압은 세속주의를 훼손하는 불순분자를 솎아낸다는 명목 하에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때 이전의 의회를 해산하면서 "튀르키예에 자유는 너무 큰 사치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리스]]는 1974년 [[키프로스 전쟁]]에서 튀르키예의 행동을 눈감아준 서방세계에 대한 반감으로 NATO에서 탈퇴했다가 안보 위협이 증대되면서 재가입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토 회원국들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만 회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튀르키예가 계속 반대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해성같이 등장한 케난 에브렌은 그리스의 나토 재가입을 찬성하는 대가로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로부터 정권을 용인받을 수 있었다. 당시 튀르키예 담당 CIA 국장인 파울 헨즈(Paul Henze)는 케난 에브렌의 쿠데타를 아예 대놓고 찬성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대해 튀르키예 좌파들이 미국에 대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1982년]] 11월 그는 국가안보평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1982년 [[11월 9일]] 7년 단임제 임기의 7대 [[튀르키예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전까지 튀르키예의 정치는 [[의원내각제]]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에브렌의 개헌은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집중하고 내각과 총리를 대통령의 수족으로 채우는 [[대통령제]] 헌법이었다. [[알파고 시나씨]]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케난 에브렌에 대한 튀르키예 국민들의 지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헌법 개헌 당시 무려 93%의 지지도가 나왔는데 이것도 [[2011년 러시아 총선 사태|군부에 의한 조작이 아닌]] 국민들의 진심어린 동의에 의한 지지도라고 한다. 1970년대 말의 극심한 정치혼란에 튀르키예 국민들이 완전히 지쳤기 때문이었다. 케난 에브렌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는 이후 잔혹한 고문이 폭로되면서 깨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